충청도 내포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운조)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이고,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김진후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인 김종현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그러나 김진후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이후에 김진후의 자식들이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하여, 마침내 그는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들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 버리면서까지, 열심히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김진후는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의 신해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참된 천주교 신자로서 행동하며 관장 앞에서 거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진후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 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10년이란 기간 동안 신앙인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잘 참아왔었지만,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에 옥중에서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진후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다른 고통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은 그가 옥중 생활 중에 보여준 신앙인으로 삶을 분명 기억하고 있다.
충청도 내포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종한(한현) 안드레아는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이존창 루도비코의 도움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맏형 김종현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부친 김진후 비오의 오랜 옥중 생활로 인해,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 밖에 없었고, 김종한도 그의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종한은 교리를 실천하는데 아주 열심이었는데, 그는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었고,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여 놓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종한은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는 관장에게,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이 믿고 있는 천주교가 참된 진리라고 설명하였다.
김종한은 옥에 갇힌 뒤 1년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사형을 받게 되는데, 그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 12월 19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구 감영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택현의 차남으로 태어나 조부인 김진후와 계부 김종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하여 고 우르술라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조부 김진후가 1791년부터 박해를 받은 끝에 1814년 해미 옥에서 순교하고, 계부인 김종한 또한 경상도 안동 땅 우련밭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교하여 더 이상 박해를 피할 길이 없었다. 이에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날 무렵, 부친인 김택현과 함께 서울 청파를 거쳐 경기도 용인 땅 한덕동에 정착하였다가 이웃의 골배마실로 이주해 살았다.
골배마실에 정착한 김제준의 가족은 1836년 초 모방신부가 입국하자 서울의 정하상의 집에 유숙하고 있던 그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돌아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 해 4월 지방 순방을 하던 중 골배마실 이웃에 있는 은이공소에 들렀는데, 여기에서 김제준의 장남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12월에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김제준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일당에게 체포되었다. 즉시 서울로 압송된 그는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보낸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때 배교하였다가 교우들의 권고로 다시 형조로 출도하여 배교를 취소하는 동시에 세 번이나 혹형을 당하였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고,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김종한 안드레아의 딸이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당고모인 김데레사는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나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했고,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열심한 신자로 교육시키며 집안을 모범적인 신자 가정으로 만들었다.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혼자 생활하면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대제를 지켰었고, 염경이나 묵상에도 열심하며 수계하였다. 1833년 말 중국인 유방제신부가 입국한 뒤 상경하여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으며, 앵베르 주교 입국 후에는 그녀의 양순함과 겸손함을 알고 있는 모방신부는 그녀를 추천하여 주교의 처소를 돌보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본래 순교할 원의가 있었으므로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7월 19 정 엘리사벳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그녀는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태장 280대를 맞는 등 여러 차례 혹형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순교한 조부와 부친의 모범을 따라 꿋꿋이 이겨냈고, 옥에서 만나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어린 딸 이 아가다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 나갔다. 이렇게 6개월 동안 갖은 문초를 당하던 그는 1840년 1월 9일 포청 옥에서 이아가다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손연욱 요셉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언제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고 마음이 양순하고 겸손하여, 신자의 본분을 기리는 일에 지극히 엄격하였다. 그는 가끔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손연욱은 1811년 김종한 안드레아의 딸인 김데레사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1817년 10월 덕산 배나드니에서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해미 진영의 영장이 신자들을 밀고하고 천주교 책을 갖다 바치며 배교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손연욱은 영장의 문초와 고문을 받을 때, 조금도 마음의 동요 없이 신앙을 고수하였고,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만 입을 열었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모습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북돋는 기회로 감고자 하였다.
옥에서의 생활이 6-7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신앙을 오히려 더 단단해져갔다. 우연한 기회에 관장의 허락을 받아 감옥 근처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살 허락을 얻어 몇 주일 동안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숨을 거두었다. 손연욱의 마지막 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밤새 기도를 드리고, 삼종기도를 바치고 난 후에 아침에 집을 나가 근처에 있는 샘에서 세수를 하고 샘 옆에 큰 돌에 앉아 마지막 숨을 지었는데 곁에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시신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고 여러 날 동안 굳어지지 않았다.
김재항 루도비코는 김진후 비오의 넷째 아들인 김희현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면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김진후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 한 후 모든 일가 친척들이 흩어지면서 그의 가족들은 온양의 배여동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온양 포졸들에게 잡혀 공주로 이송되었다가 그해 6월 6일에 치명하였다.
김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의 작은 삼촌인 김재철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 솔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한 후 그의 부친이 조부 김택현과 증백부인 김제준 이냐시오와 함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한덕골에서 얼마간 피난을 살다가 산 넘어 골배마실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가족들은 다시 충청도 고향 쪽으로 왔으나, 그는 큰아버지 김제봉의 양자로 가서 1846년 병오박해를 만나 은진 강경리로 피난을 갔었다. 그 후 다시 공주 금동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포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형과 가족들을 피하라고 권면하여 피난을 보낸 후 그는 자진하여 잡혀 공주에서 1867년 11월 43세의 나이로 치명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작은 삼촌인 김재철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 솔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한 후 그의 부친이 조부 김택현과 증백부인 김제준 이냐시오와 함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한덕골에서 얼마간 피난을 살다가 산 넘어 골배마실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가족들은 다시 충청도 고향 쪽으로 왔서 살았으나, 1846년에 병오박해를 만나 덕산 고을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해미 포교에게 잡혀가서 순교하였다.
김준명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의 동생인 김귀조의 손자로서 김대건 신부의 칠촌 아저씨이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인 김귀조 때부터 큰 집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인 듯하며, 그는 1827년에 김관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충청도 여사울에 가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본을 포교에게 잡혀 배교하고 나와 살았다. 그러나 배교하고 나왔음을 항상 원탕하게 생각하여, 다시 공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