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솔뫼 성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하여 순우리말로 ‘솔뫼’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신 장소이다.
증조 할아버지 복자 김진후(비오 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 할아버지 복자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성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당고모 성녀 김 데레사(1840년 서울 포청에서 순교)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님(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 신부님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장소로,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이곳(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할아버지 김택현은 대건이 7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였다.
김대건 소년은 그곳에서 15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上海) 진쟈상(金家巷:김가항) 성당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김 신부님은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순위도 앞바다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5월 6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품에 올려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조선 최초의 방인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조선전도를 만들었으며, 저서로는 21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다.

1906년, 당시 합덕 성당의 크램프 신부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김 신부님의 생가터를 고증하였고, 1946년 순교 100주년을 맞아 순교 기념비를 세우면서 성지는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 제529호(‘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로 지정된 솔뫼성지는, 1만 5천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와 더불어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기념관과 성당, 솔뫼 아레나(야외공연장 겸 야외성당), 순례자 식당, 그리고 넓은 주차장을 갖춘 가운데, 광활한 내포 평야의 한 복판에 자리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안에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

1836년  7월 11일

  모방(Maubant)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됨. 국내에서 성직자로 양성키 어렵다고 판단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와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기로 결정, 12월 3일 서울 출발.

  12월 28일

 변문() 도착. 요동()과 만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마카오 도착(1837년 6월 7일)

1836년
~ 1839년

  마카오 민란 등으로 두 번 필리핀 마닐라의 롤롬보이로 피신

1840년
~ 1841년

  마카오 대표부에서 철학과 신학공부

1842년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 에리곤(Erigone)호의 세실(Cecille)함장의 통역사 자격으로 승선하였으나 세실 함장의 마닐라 행 결정으로 하선하여 9월 11일 상해(上海) 베지(Besi)에 머물며 입국 시도.  

 10월 2일

  상해 출발하여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부근 요동 땅에 도착.
백가점(白家店)에 머물며 입국 시도.

 12월 23일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 변문으로 향함. 단독으로 입국 시도하여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돌아옴.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옴(1843.1.6)

1843년

  음력 3월과 9월 변문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동북 국경 쪽 입국 방법을 의논.
12월 31 양관(陽關)에서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ol, 高) 주교 성성식 참석.

1844년

  동북 국경을 통한 입국을 위해 2월 4일 출발.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여 4월 백가점에 돌아옴.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음(12.15이전).

1845년

  1월 1일

  네 번째로 변문에 감. 1월 15일 귀국에 성공하여 서울 도착.
 

  4월 30일

 11명의 신자와 함께 라파엘호에 탑승, 제물포를 출발하여 6월 4일 우송코우(吳松口)를 거쳐 상해에 도착.

 

  8월 17일

 상해 진쟈샹(金家基)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받음.
8월 24일 헝탕(橫塘)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 8월 31일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신부를 태우고 상해 출발. 제주 용수리 포구에 표류.

  10월 12일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 11월과 12월 서울 및 은이공소 순방.

1846년

  4월 8일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통로의 개척을 위해 5월 14일 마포 출발,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보내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월 5일, 관헌에게 체포됨.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됨.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힘. 7월 20일 르그레즈와와 리브와 등 스승 신부들에게 하직 편지 씀. 8월 29일 페레올 주교와 교우들에게 하직 편지 씀.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순교. 김 신부의 시신은 10월 26일 미리내로 안장되었고, 1901년 5월 21일 용산 신학교로 이장 되었으며, 1960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됨.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순교자 79명과 함께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결정됨.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발자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관련된 성지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김씨 집안의 4대 순교자가 살던 신앙의 못자리이다.
김대건 신부님과 그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그리고 당고모인 성 김 데레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순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안드레아 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터로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다.


면천 고을 솔뫼로 불리던 이 곳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에 태어났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하여 솔뫼(松山)라 불린다.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일명 운조)는 50세에 영세한 이후 ‘내포 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 신유 박해 때 체포, 10여년을 옥살이하다 해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후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안드레아, 일명 한현)이 순교했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님이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며, 김제준(이냐시오)성인과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님의 소년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며,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골배마실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그의 나이 15살 때에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님의 눈에 띄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골배마실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님이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 우술라의 모습을 새긴 부조만이 남아 있다. 또 하나 김대건 신부님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되면서 시작된 교우촌으로, ‘은이’(隱里)란 글자그대로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 공소는 1836년 4월, 조선 최초의 선교사 모방 신부님이 소년 김대건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님이 1845년 11월경부터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약 6개월간 기거하면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곧 김대건 신부님의 첫 사목지이며, 조선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중국 광동성 중산현 남부, 주강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도시로, 1557년 포르투갈인이 거주권을 획득한 이래 포르투갈 동양무역의 근거지가 되는 장소였다. 동시에 가톨릭의 극동지역 선교의 전초지가 되었던 곳이다.


1565년 예수회가 이 곳에 본부를 두어, 성 바오로와 성 요셉의 두 신학교를 설립, 성직자를 양성하였고 예수회가 일본 및 중국에 대한 선교를 가능케 하는 데 큰 공을 남겼던 곳이다.
그리고 1732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중국을 위시한 조선 선교를 위한 물자 조달과 성직자들의 교황청과의 서신 연락을 담당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특히 브뤼기에르 주교님과 함께 조선 입국을 원했던 모방 나 신부님이 이곳을 경유, 서양인 성직자로서 1835년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그 이듬해인 1836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이들 세 소년은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1842년까지 6년간 이 곳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 사람 중 최 프란치스코는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머나 먼 타국 땅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조선 복음화를 위한 사제 수업을 받았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필리핀 롤롬보이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이 건립 된 곳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그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의 농장이 있었던 장소로 1836년 15살 되던 때에 최방제와 최양업과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중 1839년 4월 마카오 민란으로 피난하여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85년 오기선 신부님이 현지를 답사하여 개인 소유였던 이곳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이었던 것을 확인된 후 소유주인 모데스따, 멘도사 할머니에게 동상 부지를 제공해 줄 것을 간청하여 승낙을 얻어낸다.


그 후 김대건 신부님 동상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말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님 그리고 윤공희 대주교님, 김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을 비롯한 현지 교민, 많은 순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6년 5월 22일 건립 되었다. 

소팔가자는 중국 장춘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김대건 신학생은 통역관으로 프랑스 해군 세실제독과 남경조약 체결에 참석차 1942년 3월 26일 프랑스 메스트르(Maistre)신부님과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 카오를 떠나 마닐라를 경유하여 중간 기착지인 현재 대만의 탐수진 항구를 거쳐 1842년 7월 담수진을 떠나 상해에 도착, 남경 조약에 참석하게 된다. 그 후 10월 11일 청나라 목선을 타고 그달 25일 요동 지방의 대장하에 도착, 요동 서남 끝에 있는 백가점에 체류하다 가 제3대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님이 머물던 내몽고 소팔가자로 갔다.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박해 상황을 전해 듣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님은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을 세웠으나 만주 교구 방(Verolles)주교님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소팔가자는 후일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은 장소이며 여덟 가족이 정착해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소팔가자라고 불렸다.

중국 상해의 진쟈샹 성당은 한국 교회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1845년 8월 17일 제3대 조선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유서 깊은 곳이다.
서품식은 페레올 주교님의 주례로 다블뤼 신부님을 비롯하여 서양인 신부 4명과 중국인 신부 1명이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성당 안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경당에는 김 신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진쟈상 성당으로 발음되는 金家巷 성당은 17세기 명나라 숙종(162-43)때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건립된 후 1841년에는 남경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었고, 중국교회 동부지역 복음화의 산실임과 동시에 한국 교회와도 많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진쟈상 성당은 김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붙여진이름이다. 말 그대로 김씨들이 모여 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님이 서품 7일 뒤인 1845년 8월 24일 첫 미사를 봉헌한 헝탕 신학교 성당으로 현재는 상해에서 35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납골당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주도 서쪽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김대건 신부님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박을 구입(라파엘 호라 명명)하여,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진쟈샹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김대건 신부님 그리고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 호는 상해 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한 지 3일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그곳을 떠난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 강경 황산포 부근에 도착하였다.

나바위 성지는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의 하나로 김대건 신부님이 1845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그리고 11명의 조선 교우들과 서해를 통하여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다.


본래 화산(華山)이라는 이름은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 라고 한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화산 성당이라 불리웠던 이 곳은 김대건 신부님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 신부님이 1897년에 설립해 1906년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김대건 신부님, 처음 한국에 들어왔던 외국인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성 앵베르 주교님, ‘기해일기’의 현석문(가롤로) 성인을 포함하여 아홉 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있는 곳이 새남터이다.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웠다. 새남터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 지점에 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리고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였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주문모 신부님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인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 산골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속으로 옮겨 살면서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 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